본 글은, 2025년 10월 27일 매일경제와의 서면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관련 기사는 말미에 추가해 두었으니,
관심이 있는 분들의 많은 참고 바랍니다.
질의 2. 다케이치노믹스의 핵심 중 하나는 ‘경제 안보’입니다.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 산업에서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일본의 독자적인 공급망 강화 전략이 한국과의 협력 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보십니까? 양국이 경쟁 관계를 넘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구체적인 협력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요?

1. 새로운 패러다임: 효율성에서 ‘경제 안보’로
미중 패권 경쟁과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글로벌 경제 질서는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맞이했다. 과거 비용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글로벌 공급망 최적화 시대는 저물고, ‘경제 안보(経済安全保障)’가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이는 반도체, 배터리, 핵심 광물과 같은 전략물자의 공급망을 단순히 경제적 관점이 아닌, 국가 안보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시대의 규칙은 ‘가치를 공유하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 국가들과 함께 안정적이고 회복력 있는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공급망의 ‘무기화’가 현실화되면서, 특정 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곧 국가적 취약점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한일 양국의 경제 협력 방식에도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구한다.
2. 일본의 전략 1: 반도체 전쟁의 새로운 국면, 구마모토의 실용과 라피더스의 야망
일본은 경제 안보라는 새로운 환경에 매우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는데, 다카이치 행정부의 '경제 안보' 독트린이 가장 적나라하게 투영된 곳은 반도체 산업이다. 일본 정부는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하여 대만 TSMC의 구마모토 공장을 유치하고, 차세대 반도체 자국 생산을 목표로 하는 ‘라피더스(Rapidus)’를 설립하는 등 자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을 강화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이는 미국이 주도하는 ‘칩4 동맹’과 같은 다자 안보 협력의 틀 안에서 움직이면서도, 핵심 기술과 생산 능력에 대한 독자적인 통제력을 확보하려는 이중 전략의 일환이다. 일본의 '구마모토 모델'과 '라피더스(Rapidus) 프로젝트'라는 투트랙 전략은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게 전례 없는 협공으로 작용한다.

2.1. 구마모토의 성공: 보조금의 위력
TSMC의 구마모토 공장(JASM) 건설과 가동은 일본 정부의 보조금 정책이 얼마나 신속하고 강력하게 집행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 파격적인 재정 지원: 일본 경제산업성(METI)은 TSMC와 소니, 덴소가 합작한 JASM의 제1공장에 4,760억 엔, 제2공장에는 7,320억 엔 등 총 1조 2천억 엔에 달하는 보조금을 승인했다. 이는 전체 투자비의 절반에 육박하는 규모다.
- 전략적 함의: 구마모토 팹은 12~28nm 공정의 로직 반도체를 생산한다. 이는 스마트폰의 두뇌인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급은 아니지만, 자동차(소니, 덴소, 도요타)와 산업용 기기에 필수적인 '산업의 쌀'이다. 일본은 이를 통해 대만 해협 위기 시에도 자국 핵심 제조업의 공급망이 멈추지 않도록 하는 '자립형 공급망'을 완성했다.
2.2. 라피더스(Rapidus)의 도박: 2027년의 위협
한국에게 더 큰 잠재적 위협은 홋카이도 치토세에 건설 중인 라피더스다. 라피더스는 도요타, 소니, 소프트뱅크 등 일본 대표 기업 8곳이 출자하고 정부가 전폭 지원하는 '국가 대항전'의 결정체다.
- 기술적 퀀텀 점프: 라피더스는 현재의 기술 단계를 뛰어넘어 2027년까지 2nm 공정 양산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미국의 IBM(2nm GAA 기술) 및 벨기에의 IMEC와 기술 협력을 맺었다.
- 구체적인 타임라인과 진척도: 2025년 4월, 라피더스는 치토세 공장(IIM-1)에서 시범 생산 라인을 가동할 예정이다. 이미 2024년 12월부터 클린룸에 최첨단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가 반입되기 시작했으며, 2025년 중 2nm 시제품을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 천문학적 자금 투입: 2nm 양산 체제 구축에는 총 5조 엔(약 45조 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 정부는 이미 9,200억 엔의 보조금을 승인했으며, 2025년 회계연도에도 8,025억 엔을 추가 배정했다. 더 나아가 다카이치 행정부는 민간 금융기관이 라피더스에 대출할 경우 정부가 보증을 서는 법안을 준비 중이다.
2.3. 인사이트: '불가결한 노드(Indispensable Node)' 전략
일본의 반도체 전략은 단순히 칩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미국 주도의 공급망에서 한국을 대체 가능한 위치로 끌어내리는 데 있다. 미국과 일본은 '기술 번영 협정(Technology Prosperity Deals)'을 통해 AI, 6G, 양자 컴퓨팅 분야에서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라피더스가 IBM의 기술을 채택한 것은 미-일 반도체 동맹의 상징적 사건이다.
라피더스가 2027년 양산에 성공한다면,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사업은 강력한 경쟁자에 직면하게 된다. 설사 라피더스의 수율이 낮더라도, 일본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은 가격 경쟁력을 왜곡시킬 수 있다. 또한, 일본은 'J-Skip'과 'J-Find' 비자를 통해 전 세계, 특히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엔지니어를 흡수하려 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R&D 세액 공제 확대 등 지원책을 내놓고 있지만, 일본처럼 '현금'을 직접 꽂아주는 속도전 앞에서는 경쟁력이 뒤처질 수밖에 없다.
3. 일본의 전략 2: 디지털 주권과 라인야후 사태, 플랫폼의 국적을 묻다
일본의 전략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는 동맹국인 한국에 대해서조차 핵심적인 공급망에서 새로운 의존 관계를 만드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는 것이다. 최근 발생한 ‘라인야후(LINE Yahoo)’ 사태는 이러한 일본의 속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일본 정부는 라인야후가 자국의 핵심 통신 인프라이자 경제 안보상 중요 자산이라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한국 기업인 네이버의 경영 통제력을 축소하라는 행정지도를 내렸다. 이는 동맹 관계와 별개로, 자국의 경제 안보에 직결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3.1. 사건의 발단과 행정지도의 본질
2023년 11월, 네이버 클라우드를 경유한 해킹으로 라인야후에서 약 51만 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 총무성(MIC)은 2024년 3월과 4월, 두 차례에 걸쳐 이례적으로 강력한 행정지도를 내렸다.
- 자본 관계 재검토 요구: 총무성은 "시스템 위탁처(네이버)가 자본적인 지배 관계에 있어 적절한 관리·감독이 어렵다"는 논리를 들어, 네이버와 소프트뱅크의 자본 관계를 재검토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사실상 네이버에게 라인야후의 지분을 줄이고 경영권을 소프트뱅크에 넘기라는 압박이었다.
- 법치를 가장한 통치: 행정지도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권고'에 불과하지만, 일본의 관치 금융 및 산업 구조상 기업이 이를 거부하기는 불가능하다. 다카이치 총리가 주창하는 '적극적 사이버 방어'와 맞물려, 일본 국민 9천만 명이 사용하는 라인(Line)을 한국 기업이 통제하는 상황을 안보 리스크로 규정한 것이다.

3.2. 구조적 덫: A홀딩스와 교착 상태
라인야후의 지배구조 정점에는 'A홀딩스'가 있다. 네이버와 소프트뱅크가 A홀딩스의 지분을 정확히 50:50으로 보유하고, A홀딩스가 라인야후의 지분 약 64%를 보유하는 구조다.
- 소프트뱅크의 공세: 일본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소프트뱅크는 네이버에 지분 매각을 종용하고 있다. 2025년 11월 현재, 소프트뱅크와 네이버 간의 지분 협상은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었다. 네이버의 최수연 CEO는 "단기적인 지분 매각은 없다"고 선을 그었으나, 중장기적인 전략적 결정에 대해서는 여지를 남겼다.
- 라피더스와의 연결고리: 흥미로운 점은 라피더스 프로젝트에 소프트뱅크가 주요 주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 소프트뱅크는 '디지털 주권'을 수호하는 기수이며, 라인을 통해 확보된 거대한 데이터는 일본의 독자적인 AI 모델(SoftBank-OpenAI 협력 등) 구축에 필수적인 자산이다.
3.3. 2차 파장: '코리아 리스크'의 현실화
이 사건은 일본에 진출한 모든 한국 IT 기업(카카오, 넥슨, NC소프트 등)에게 경고장을 던졌다. 일본 시장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여 '중요 인프라'로 간주되는 순간, '안보'를 명분으로 한 경영권 박탈 시도가 일어날 수 있다는 선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한일 투자 협정의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지만, 다카이치 정권 하에서 이러한 '경제적 강압(Economic Coercion)'은 더욱 빈번해질 가능성이 높다.
4. 첨단산업 협력의 환상: 협력보다는 경쟁이 우선
이러한 일본의 전략적 계산을 고려할 때, 한국 일각에서 제기되는 인공지능(AI), 차세대 반도체, 핵심 광물 등 첨단 전략산업 분야에서의 깊이 있는 한일 협력에 대한 기대는 다소 순진한 측면이 있다. 이 분야들에서 한국과 일본은 협력 파트너이기 이전에, 글로벌 시장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치열한 경쟁 상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양국의 상위 수출 품목 다수가 겹치는 경합 관계에 있다.
한국에서는 ‘한일 협력’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이러한 전략 분야에서 ‘일한 협력’이라는 용어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이는 우리가 경제 안보라는 새로운 시대의 규칙을 너무 안일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일본 입장에서 첨단 기술과 핵심 광물은 자국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며, 이를 경쟁국인 한국과 선뜻 공유할 유인은 거의 없다. 따라서 이 분야에서 양국 관계는 미국 주도의 큰 틀 안에서 관리되는 ‘경쟁적 공존’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5. 시너지를 위한 현실적 협력 방안: 첨단기술 경쟁을 넘어서
그렇다면 한일 양국이 진정으로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협력 분야는 어디인가? 그것은 치열한 제로섬 경쟁이 벌어지는 첨단산업이 아니라, 양국이 공통으로 직면한 구조적 문제와 비경쟁적 영역에서 찾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다음 세 가지 분야에서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협력이 가능하다.
- 공동의 구조적 위기 대응: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가장 빠른 속도의 고령화는 양국 모두의 미래를 위협하는 가장 큰 도전이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보장제도 개혁, 정년 연장, 외국인 노동력 활용 정책 등에 대한 경험과 데이터를 공유하고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것은 양국 모두에게 큰 이익이 될 수 있다.
- 녹색·디지털 전환 협력: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한 수소 에너지, 재생에너지 기술 개발과 표준화, 그리고 전통적인 제조업 및 서비스업의 디지털 전환을 가속화하는 분야에서 협력의 여지가 크다. 이는 경쟁보다는 공동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대표적인 분야다.
- 청년 화이트칼라 노동시장 통합: 이는 필자가 제안하는 협력 방안으로, 일본은 심각한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반면, 한국은 높은 청년 실업률로 고통받고 있다. 양국 청년 전문 인력들이 보다 자유롭게 상대국에서 취업하고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비자 제도를 완화하고 관련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은 양국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미래 세대 간의 깊은 유대를 형성하는 ‘윈윈’ 전략이 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한일 협력’ 담론이 가지는 또 다른 측면은, 그것이 때로는 독자적인 국가 경제 안보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회피하는 정치적 수사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했을 때, 가장 먼저 ‘일본과 협력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손쉬운 대응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분석했듯, 일본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매우 계산적으로 움직이며, 우리의 기대만큼 협력에 적극적이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협력이라는 구호에만 매달리는 것은, 한국이 독자적인 협상 자산과 외교적 입지를 활용하여 주도적으로 국가 전략을 수립할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 전략적 안일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진정한 질문은 ‘어떻게 일본과 협력할 것인가?’가 아니라, ‘글로벌 경제 안보 지형 속에서 한국의 고유한 생존 전략은 무엇이며, 그 전략의 일부로서 일본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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