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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 × 曘泳/에세이 × エッセイ

청춘18과 함께 한 에키벤駅弁 - 일본의 기차와 도시락

 

에키벤駅弁

 

  그리 오래지 않은 유학시절, 연구실의 선후배들과 공동연구를 위해 큐슈九州로 방언조사를 떠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길은 오사카大阪를 출발해서, 숙소로 정한 큐슈의 구마모토현熊本県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아라오荒尾라고 하는 베이스캠프를 향한 긴 여정이었죠. 물론 자동차로 작정하고 달리면 9시간, 신칸센新幹線이라면 3시간 30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거리였습니다만, 우리 일행은 가난한 대학원생답게(?) 무리해서 청춘18티켓(青春18切符)을 끊고는 완행열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더랬습니다. 물론 그것이 고생의 시작이란 것은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방학이라는 들뜬 마음과 당시의 경제적 사정이 그와 같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도록, 아니 애써 외면하게 해 주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청춘18티켓(青春18切符) : 주로 학생들이 봄・여름・겨울 방학기간에 이용할 수 있도록 판매되는 열차 티켓으로, 국영철도라면 신칸센新幹線 및 특급 그리고 급행 등을 제외한 완행열차를 기간 동안 무한정 타고 내릴 수 있는 티켓. 가격은 5회(혹은 5인)분으로 11,500엔

 

청춘18티켓 青春18切符

 

  결국 우리 일행은, 아침 530분에 집에서 가장 가까운 역인 토요나카豊中에서 열차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열차를 갈아타며 오후 1시 무렵에서야 히로시마広島를 통과할 수 있었고, 셀 수 없는 환승을 거쳐, 기차만 16시간을 타고나서야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 생각해 봐도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여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16시간이라니! 비록 우리들의 여정이 연구를 위한 조사가 그 첫 번째 목표였다고는 하지만, 방학을 맞아 떠난 들뜬 학생들의 '여행'이기도 했다는 점이 그 긴 시간을 열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 수많은 요인들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여행의 시작, 토요나카역豊中駅

 

  그리고 또 하나. 상투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여행이 반드시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전부가 아닐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들의 여행은 반드시 비행기와 KTX와 같은 더 빠르고 더 편리한 교통수단으로만 떠나야 했을 것이겠죠. 하지만, 당시 우리들은 완행열차에서 흔들리며 차창 밖으로 지나는 수많은 낯선 풍경들과 함께,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사람들 그리고 그네들이 함께 끌고 온 다양한 생활의 모습과 향기를 마치 호흡하듯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옆에 앉은 아이의 귀여운 말과 앞자리에 앉아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여고생들의 대화, 그리고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던 샐러리맨의 정중한 말과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지방색 짙은 말, 그 하나하나가 활자가 되어 눈앞에서 떠오르는 듯 했습니다. 일본어 그 자체, 그 살아있는 언어들이 마음으로 다가오는 듯 했고, 마치 우리가 가야할 곳에 대한 이정표들 같았습니다. 그 모든 언어들은 마치 우리들이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등을 떠 밀어주는 든든한 존재들처럼 다가왔었습니다.

 

히로시마역広島駅에서 나누어주던 기차 매너 캠페인 전단지

 

  그런데 이러한 여행을 더욱 더 즐겁게 해 주는 존재가 또 하나 있었습니다. 아니, 여행 자체의 목적이 되기도 하는 것. 다름 아닌 바로 음식입니다. 게다가 일본에서 열차여행이라면 도시락을 빼 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는데, 그것이 바로 에키벤駅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에키벤의 사촌(?)과도 같은 비행기에서 먹는 도시락, 소라벤空弁이 있을 정도로 워낙 여행과 연관된 도시락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에게, 에키벤駅弁은 단순한 도시락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한국에서 온 이방인의 눈에는, 역마다 그 다양한 이름만큼이나 다양한 음식과 사연을 담은 일본의 에키벤이 너무나도 낯설고 또한 신기한 존재였습니다. 열차시간에 늦을세라 서두르면서도 한손에는 에키벤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으며, 냄새라면 그렇게도 신경을 쓰는 그네들이 열차 안에서도 거리낌 없이 도시락을 열고 환호하며 그 내용물에 관해 즐겁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열차 안에서 그리고 플랫폼에서 하나 가득 행복한 얼굴로 에키벤을 즐기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죠.

 

일본 항공사, 전일본공수全日空의 소라벤空弁

 

  우리들을 포함한 에키벤을 대하는 그 모든 사람들은, 냉장고 속에 몰래 숨겨둔 맛있는 간식을, 혹은 어머니가 준비해 놓을 맛있는 저녁을 떠올리며 집으로 잰 걸음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처럼, 그 맛은 어떨지 그리고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지, 또한 어떻게 만들었을지, 어떤 사연을 갖고 있는지 등등, 수많은 두근거림을 마음 한가득 품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지간히 배가 고프지 않는 한, 그네들은 열차에 타자마자 에키벤을 먹기 시작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마치 그 존재를 까맣게 잊었던 것처럼 '배가 고픈데, 뭐가 있었지?'라고 하는 자신의 물음에, 열차 안에서 그 어떤 음식보다도 멋지게 대답해 주는 존재를 떠올리며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하나의 의식처럼 말입니다.

 

히메지역姫路駅의 에키벤駅弁, 문어밥たこめし

 

  간사이関西 지방을 지나 히메지姫路를 끼고 츄고쿠中国지방을 통과해서 히로시마広島를 관통한 후, 드디어 우리들은 시모노세키下関를 오른쪽으로 두고, 수많은 큐슈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생각으로 가슴을 뛰게 했을 칸몬쿄関門橋를 넘어 혼슈本州를 뒤로하고 큐슈로 들어갔습니다.

 

시모노세키역下関駅의 에키벤駅弁 복어초밥ふぐ寿司

 

  그리고 우리의 여정에서 한국과 가장 가까운 후쿠오카福岡를 경유해서 다시금 남쪽으로 달려 목표한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이 긴 여정에서 우리들은 열차 안에서,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시골 역의 플랫폼의 벤치에서 그리고 열차와 열차 사이의 빈 공간에서, 모두 세 개의 에키벤을 먹었습니다.

 

각별한 맛, 기차에서 마시는 맥주

 

  무심코 정차한 역에서 발견한 그 지방의 음식을 그 때의 풍경과 바람을 맞으면서 그 지역의 언어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던 그 각각의 에키벤은, 회상컨대 구체적인 이름을 떠올릴 수는 없으나 마치 여행 전체와 결합되어 떼려야 뗄 수 없는 여행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도 에키벤을 좋아하는 그네들도 그러할까요?

 

홋카이도北海道 하코다데函館 에키벤 - 이카메시(오징어 밥)

 

  모르긴 몰라도 한 가지 단정할 수 있는 점은, 일본인에게 있어서, 그리고 일본을 여행하는 여행객들에게 있어서, 열차 안이라고 하는 좁은 공간에 에키벤을 먹는다는 것은 식사 이상의 하나의 커다란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금, 에키벤을 들고 어디론가 일본 여행을 떠나고 싶은 충동은, 옛 영화와 드라마에서 보았을 법한, 삶은 계란과 사이다, 그리고 감귤이 대표하는 우리들의 열차여행의 향수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기차안의 간식 카트

 

  하지만, 이제는 아무리 훌륭한 에키벤과 함께 라고 할지라도, 개인적으로 앞으로 16시간의 기차여행만은 정중하게 사양하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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